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조르게 (문단 편집) === 처형 === >"나는 1차 대전에 [[독일 제국|아버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지만, 나는 [[소련|내 어머니 조국]]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 >---- >체포 당시[* 조국을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 [[독일어]]로는 Vaterland로 아버지가 들어가고 [[러시아어]]로는 Родина로 어머니가 들어가는 말이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실제로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르게의 증조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였다. '''두 개의 조국'''이라는 개념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러시아 민족주의적, 패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이전까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관념이었다. 실제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민족적 조국이라면 소련은 계급과 사상의 조국이고, 따라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매국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이전의 소련은 명목상 '민족 집단과 영토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국가'로 여겨졌고, 소련의 국체 역시 명목상으로는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합체였다. 결국 범세계적 혁명을 통해 모든 나라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재편한다면, 이 형제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이룸으로써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꿈이었다.] 일본 제국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리하르트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1941년]] [[10월 14일]]에 먼저 체포되었고, 리하르트 조르게는 [[10월 18일]]에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 정보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 제국은 조르게를 [[해외방첩청]](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첩보국은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리하르트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성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리하르트 조르게를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 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이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처형되었다.[* 리하르트 조르게와 오자키 호츠미가 소련으로 송신한 비밀 무선의 내용을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끝끝내 해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1회용 암호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소련과 리하르트 조르게가 사전에 정한 해석 코드를 발견하는 게 필수였는데, 이것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1회용 암호표(Ontime pad)를 이용한 암호는 이론상 절대적인 보안 기능을 가지기 때문에 암호표 자체를 입수하지 못하는 한 무한한 계산 자원을 동원하여 무한한 시간 동안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하더라도 해독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강력한 보안 기술이 다른 분야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발신자와 송신자가 반드시 같은 암호표(해석 코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 불특정 다수간의 통신에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신을 위해 암호표를 전송하다가 탈취당한다면, 당연히 그 암호표에 의해 암호가 해독된다. 만약 암호표가 탈취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안전한 전송수단이 있다면 그냥 그 수단으로 평문을 전송하면 된다.) 다만 스파이와 본국간의 통신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교신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 호츠미는 혹독한 고문과 심문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색되어 버렸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 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 있던 [[2000년]]까지 계속 리하르트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